이론적 배경

기억2 - 감사원 도서실

경기고등학교에서 처음 치룬 월례고사에서 반에서 30등 정도 성적이 나왔다. ‘음, 역시 공부잘하는 아이들이 많구나…’하고 생각을 했다. 그러려니 하고 특별히 열심히 공부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어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문예반활동과 1주일에 한번 씩 여학생들을 만나는 독서클럽 활동으로 고1은 바빴다. 그래도 반에서 중간 정도의 성적은 유지하고 있었다. 서울대학교 시험을 당장 치른다면 합격할 성적은 아니었지만, 조금만 공부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중학교 때도 2학년 때는 반에서 20등과 30등 사이를 맴돌다가 중3 때 바짝 공부해서 전교 2등까지 올랐고, 그 기세로 경기고등학교에 합격했던 경험이 있었으니까. 

고2 1학기 말 기말고사에서 받은 성적은 반에서 62명 중 59등, 문과 전체 312명 중에서 292 등이었다. 심각한 수준이었다. 아무리 경기고등학교지만 그 성적으로는 서울대학교에 갈 수 없었다. 문예반 활동도 접고, 독서클럽 출석도 그만두고 공부를 하기로 했다. 마침 학교에서 여름방학 한달 동안 감사원 도서관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입장권을 희망자들에게 무료로 나눠줬다. 감사원은 당시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종로구 화동 1번지에서 좀 더 뒤에 있는 삼청공원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감사원 도서관은 커녕 감사원도 가 본 적이 없었지만 선생님이 알려주는 위치와 교통편 설명을 듣고 지원했다. 그때 나는 그 당시만 해도 서울의 신흥주택개발지였던 장위동에서 살고 있었다. 그 당시 장위동은 논들이 아직 남아있었다. 31번이나 30번 버스를 타고 시내를 가려면 우리 집에서 논길을 한참 걸어가야 했다.

집에서 감사원 도서관을 가려면 한 시간 이상이 걸렸고, 왕복으로 치면 두 시간 정도 거리였지만 학교까지 통학에 걸리던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나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 해 여름방학 내내 계속된 감사원 도서관 등교가 시작되었다. 가서 보니 우리학교 학생들 만 몇 몇 있을 뿐, 다른 학교 학생들은 없었다.

감사원 도서관은 그때까지 내가 이용했던 시설들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널찍한 도서관 열람실에 테이블이 여럿 있었는데, 거기서 자료를 보거나 책을 읽는 직원은 거의 없었다. 우리학교 친구들이 그 시설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고 있었다. 요즘에야 대한민국 어디를 가나 실내에는 에어컨이 가동되는 것이 기본이지만 그때는 1973년이었다. ‘우리가 중진국이 맞나, 아직도 후진국인데 괜히 중진국이라고 정부에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심을 고등학생들도 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에어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서관에서 내다보는 감사원 마당은 잔디가 파랗게 깔려있었고, 스프링쿨러가 돌아가며 잔디에 물을 주고 있었다. 스프링쿨러를 그때 처음 본 것 아닌가 싶다. 형제들과 함께 지내는 단간방, 선풍기도 없는 그 방에 비교하면 감사원 도서관은 왕복 하루 2시간의 시간을 들여서라도 갈 만한 곳이었다. 게다가 친구들도 있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선배들이나 귀찮게 하는 후배들은 없고 오로지 우리 동기들 만 몇 명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아침에 만나면 눈인사를 나누고 각자 자기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다 점심 때가 되면 각자 준비해 온 도시락을 함께 앉아서 먹었다. 나는 주로 오성환과 함께 먹었다. 오성환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서 한국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미국가서  박사를 따고 귀국해서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를 했다. 

매일 저녁 도서관이 문을 닫을 때가 되면 성환과 나는 그날 공부한 분량을 서로 비교했다. 둘 다 공부하는 책은 똑 같았다. 지금은 성문종합영어로 이름이 바뀐 정통종합영어와 수학1의 정석이었다.   

그날 진도가 적게 나간 사람은 약간의 열패감을 갖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 날은 더 많은 진도를 내리라 결심하면서. 만약 그 때 오성환이 없었다면 내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먼 도서관까지 가서, 매일 조금이라도 더 진도를 내려고 노력하면서 공부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한 달을 공부한 뒤에 치른 2학기 첫 모의고사 성적을 받았다. 반에서 5등, 전교 23등이었다. 학급석차는 54등이 올라갔고, 전교 석차는 269등이 올라갔다. 나같은 현상은 그 학교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학교에서는 그런 학생을 격려하는 상이 예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조회 시간에 그 전 모의고사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에게 시상을 한다. 3학년은 학년 초부터, 2학년은 2학기부터 그 대상이 되었다. 2학년과 3학년의 문과와 이과별로 베스트 10을 시상하고, 지난 모의고사 성적보다 전교 석차가 150등 이상 올라간 학생에게는 노력상이라는 이름의 상을 시상한다. 삼각형 펜던트가 상장이었다. 

그 학교 통설에 노력상 두 번 받은 학생은 반드시 서울대학교에 떨어진다는 속설이 있었다. 

한번 받고 계속 열심히 하는 학생은 붙지만, 한번 받고 난 뒤에 ‘아하, 공부가 별 것 아니구나. 나는 역시 머리가 좋아’하고 자만해서 놀다가 다시 공부해서 노력상을 받은 학생은 그 다음 번에도 놀게되고 그 이후에는 놓친 공부를 따라잡지 못해서 서울대학교에 합격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노력상을 한번만 받았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입시에서 단번에 합격했다. 내가 입학할 때 서울대학교는 계열별로 신입생을 

문과에서 제일 커트라인이 높은 계열은 사회계열이었다. 거기에 지금의 법학부와 경제학부, 그리고 사회과학부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정원은 48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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